잃어버린 고리: 빅토리아 시대의 괴물 쇼


19세기에 W. & D. Downey가 촬영한 '위대한 파리니'와 크라오

‘위대한 파리니(Great Farini)’라고 알려진 쇼맨 윌리엄 레오나드 헌트(William Leonard Hunt)는 1880년대 초반에 시암(Siam: 태국의 옛 명칭)의 속국이었던 라오스에서 크라오(Krao)라고 불리던 한 어린 소녀를 붙잡아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차가운 대도시 런던으로 데려갔다. 파리니에게 붙잡혔을 당시엔 아마도 4살쯤 되었을 소녀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꺼운 머릿 털로 온 몸이 덮여 있었고, ‘두 줄로 난 이’, ‘주머니 같은 뺨’, ‘두 개의 마디로 된 손가락 관절’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파리니는 크라오를 인간과 동물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The Missing Link)’라고 이름 붙여 런던 수족관에 전시했다. 그녀를 보러 많은 인파가 모였고, 언론과 잡지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크라오 전시회는 일반적으로 ‘괴물 쇼(freak show)’라고 알려져 있는 일종의 공연이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용어가 불쾌하게 여겨지지만, 19세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용되었다. 괴물 쇼는 상점, 극장, 박람회나 크라오의 경우처럼 수족관에서 열렸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괴물 쇼에 몰려들었다. 그 세상에서 크라오는 스타였다.

역사학자들은 크라오와 같은 사례를 조사하고 기술하는 데 있어 신중해야 한다. 그녀는 매우 어렸기 때문에 라오스에서 데려올 때는 물론이거니와 런던에서 전시를 하는 데 있어 그녀의 동의를 받을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아동 학대 및 인신매매로 간주한다. 크라오에 대해 논의하고, 특히 그녀의 사진을 싣는 것은 우리가 또다시 그녀를 전시하고 조롱당하게 하는 상황을 재현할 위험이 있다. 자칫 우리는 괴물 쇼의 새로운 관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쓰지 않는 것 또한 문제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크라오가 살았던 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크라오는 불과 140년 전에 존재했고, 현대 영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불편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도 포함된다. 크라오의 전시에서 우리는 인종, 성,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다름’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차별하는 사회를 본다.


괴물과 악마

다르거나 이상하게 생겼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직접 전시하는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와 근세 초기에는 선천적인 장애와 같이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은 ‘괴물’로 여겨져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불친절했다. 그들은 장애를 가진 이를 조롱하거나 무시했고, 최악의 경우 귀신 들렸거나 악마로 여겨졌다. 오랫동안 장애인들은 유흥꺼리였다. 작은 신체의 ‘궁정 광대’는 대표적인 예다. 18세기와 19세기 동안 다른 존재라고 여겨졌던, 특히 신체적 장애가 있던 사람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전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1840년대부터 ‘freak of nature’라는 단어를 줄인 ‘freak’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때부터 이런 전시나 공연은 ‘freak shows(괴물 쇼)’로 광고되고 공개적으로 토론되었다.

이 쇼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강조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보통 대도시와 작은 마을을 돌며 공연을 했고, 매 해 수천 명의 사람을 끌어보았다. 여기엔 저렴한 입장료 덕택이 큰데, 일부는 입장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또한 이런 쇼는 누구나 즐길 수 있었다. 괴물 쇼를 즐기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쇼는 모든 계급과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즐길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코끼리 인간'으로 불린 조셉 캐리 메릭


괴물 쇼는 주로 오락을 위한 것이었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과학에 대한 아이디어와도 관련이 있었다. 다른 존재로 여겨진 이들은 분명 ‘과학적’ 목적으로 전시될 수 있었다. 이들을 찌르고, 자극하고, 질문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심문했다. ‘코끼리 인간’으로 불린 조셉 메릭(Joseph Merrick)의 경우가 그러했다. 모든 자료에 따르면 원래 메릭은 화이트 채플 지역의 작고 더러운 소규모 공연에서 전시되었다. 이 괴물 쇼의 방문객 중에는 인근 왕립 런던 병원 의사인 프레드릭 트레브(Frederick Treves)가 있었다. 그는 의학적 호기심으로서 메릭을 살펴보고 싶어 했다. 트레브는 프랑스의 한 장터에서 메릭을 설득해 탈출시켜 구경거리에서 끝내 구출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릭에게 제공한 대안적 삶에는 병원에서 반영구적으로 지낼 수 있는 것과 함께 여전히 여러 사람이 그들 조사한다는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크라오가 오락을 위해 전시되는 동안, 위대한 파리니와 크라오의 전시 마케팅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진화론에 대한 최근 발견과 관련한 가장 과학적인 수사학을 사용해 쇼를 꾸몄다. 인기 있는 잡지 <벨스 라이프(Bell’s Life)>는 이 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이 인간 원숭이는 수염 난 여자, 얼룩무늬 개나 거인과 같은 조화의 장난(lusus naturae)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특이성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괴물 쇼로 취급했다.


파리니와 크라오

크라오가 전시품으로 놓여있는 동안, 그녀의 캐나다인 전시 출품자는 그 나름대로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파리니는 윌리엄 레너드 헌트로 1838년에 태어났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질러 줄타기를 하는 등 공중 그네, 줄타기, 곡예사로 자리매김하면서 성인기 초기에 파리니를 그의 무대 이름으로 정했다. 크라오는 파리니가 런던에서 로사 마틸다의 ‘인간 대포’를 포함해 다른 여러 공연을 주최하며 쇼맨으로 일하던 시기에 그의 삶에 들어왔다. 크라오에 대한 홍보 자료 전체에서 볼 수 있듯 파리니는 평생 동안 인종과 제국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1880년대 중반 잠시 공연 사업을 떠나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는 칼라하리 사막을 도보로 횡단했는데 백인으로서는 최초였다. 그는 1886년에 제국주의 모험담 형식으로 이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역설적으로, 그녀가 그토록 공개적으로 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니가 제공한 정보 외에는 크라오가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정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료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을 라오스, 시암 또는 버마로 다르게 적혀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도 서로 다르는 등 정보가 충돌했다. 파리니가 제작한 팸플릿에 따르면 크라오는 동물학자이자 작가인 프랭크 버클란드(Frank Buckland)와 파리니가 인간과 동물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으려는 계획의 결과로 발견되었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확인이 어렵지만, 크라오와 그녀의 부모는 붙잡혔고, 부모는 죽고, 크라오는 파리니가 영국으로 데려간 것 같다. 그녀는 런던에서 몇 년 동안 공연한 후 미국으로 갔고 이후 줄 곳 그곳에 머물렀다. 이러한 인생 후반기 공연들이 어느 정도까지 그녀의 의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항상 자발적으로 자신을 전시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역사가들이 자주 논의해 왔듯이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털 많은 인종

크라오의 전시 팸플릿의 작성 방식과 이 전시회의 주요 요소에 대한 신문의 보도는 크라오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주장에 때때로 회의적이었던 청중들 때문에 이것이 항상 받아들여졌던 건 아니다. <월드(World)> 지의 저널리스트는 1883년 1월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잃어버린 고리’의 존재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무너뜨렸다고 말할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지만, 털 많은 인종의 존재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는 확신은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고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이 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크라오가 전시될 당시 영국은 인간이 다른 종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찰스 다윈의 주장을 둘러싼 논란에 사로 잡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견에 충격 받았고, 진화론을 믿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인간과 오랑우탄 사이의 진화 단계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다윈의 무능력은 진화론 전체에 대한 많은 회의론을 불러일으켰고,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고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 많은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파리니는 쇼맨으로서의 능력으로 크라오에 대한 마케팅 방식으로 이 주제적인 관심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언론에 의해 채택되었다. 1883년 1월 6일 자 <스포팅 앤 드라마틱 뉴스(Sporting and Dramatic News)>의 기사에서는 크라오의 전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위대한 파리니가 거기 서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중개상과 여행 티켓을 가지고 가련한 다윈이 일생 동안 “세계의 모든 동물”로 달성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몇 달 만에 해냈다.’

그것은 또한 크라오에게 나타나는 동물 이미지의 힘을 증언한다. 그녀가 단지 털이 많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은 의미심장했다. 언론은 ‘그녀의 몇몇 해부학적 구조는 원숭이와 매우 흡사하다’고 하거나 ‘그녀는 원숭이와 같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원숭이처럼 음식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주머니 같은 볼을 가지고 있다’며 이러한 측면을 부각했다. 동물과 같은 사람이나 동물과 사람의 흥미로운 혼합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괴물 쇼에서 신체적인 차이를 가진 사람을 ‘괴물’로 바꾸는 흔한 방법이었다. 인간의 경계를 둘러싼 불안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격차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괴물 쇼를 통해 나타났다. 크라오가 런던에서 전시되고 있던 같은 시기에 ‘표범 소년’, ‘코끼리 인간’과 ‘이것은 무엇인가’ 따위의 단순한 제목이 붙은 또 다른 괴물 쇼들이 펼쳐졌다.

장애는 괴물 쇼 장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장애인은 그러한 전시의 중심에 있었다. 팔, 다리를 잃거나 혹은 그렇게 태어난 이들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다. 크라오가 런던 공연장을 떠난 몇 년 후인 1889년 8월의 한 공휴일을 맞은 사람들은 입스위치 지역의 괴물 쇼에 초대받았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 화제의 괴물 쇼이자 ‘두렵고 경이로운 개인’으로 묘사되었던 ‘팔이 없는 사람의 경이’를 볼 수 있길 기대했다. 관객들은 면도, 빗질, 협주곡 연주 등과 같은 어려운 일들을 발가락 만으로 해내는 그를 보러 왔다. 팔이 없는 사람의 몸은 ‘괴상한 것’으로 표현되지만, 보통 팔과 손으로 하는 작업을 발로 하는 기술과 그 숙달력은 비상한 것으로 표현된다. 눈에 띄는 단신의 사람들은 얼굴 기형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순회 괴물 쇼의 유명인사들이었다.


병든 사회

1847년 풍자잡지 <펀치(Punch)>는 ‘괴물 쇼’ 열풍 자체를 병이라고 조롱하며, ‘기형광(deformito-mania)’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게재했다. 잡지는 그러한 상태가 ‘기형에 사로잡힌 것’이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이 만화는 ‘기적의 홀’의 광고 벽을 보여주고 있다. 한쪽엔 ‘세계에서 가장 기형인 사람’을, 다른 한쪽엔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두 발 동물’을 볼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전시를 보기 위해 군중 사이를 헤치고, 서로 밀고, 밀어내며 미친 듯이 싸우고 있다. 이 만화는 ‘보통 사람들’을 보여주는 데, 그들은 볼 가치가 있는 전시회나 굉장한 행사처럼 이 괴물 쇼를 보기 위해 필사적이다. ‘기형광(deformito-mania)’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종류의 전시에 대한 탐욕스러운 욕구가 그 자체로 질병임을 암시한다.


1847년 9월 4일 <펀치>에 실린 만화 '기형광'

육체적인 차이를 가진 사람들은 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걸을 수 없거나, 일할 수 없거나, 종종 ‘기형’으로 논의되는 눈에 띄는 차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러한 차이가 부각되었고, 점점 더 많이 언급되었다. 문학 이론가 로즈메리 갤런드 톰슨(Rosemarie Garland Thomson)은 괴물 쇼는 장애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장애의 의미를 통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즉, 장애인을 인간과 다른 존재로 마케팅하고, 대중들이 ‘괴물’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조소함으로써 평범한 남녀들은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즉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인종과 제국

인종도 빅토리아 시대 ‘괴물 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크라오가 전시될 당시 영국은 세계 제국의 중심이었다. 1880년대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은 유럽 식민지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및 캐나다도 대영제국의 일부였다. 실제로 1880년대와 189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유럽 인구가 급증한 시기였으며, 특히 ‘아프리카 분할(서구 열강들에 의해 아프리카 영토의 점령, 분할, 식민지화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한 제국주의적 통치는 종종 폭력과 착취에 기반했으며, 인종에 대한 생각은 이것을 정당화하는 데 있어 기본이었다.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만화가 묘사하는 경멸적인 표현을 통해 유색인종과 친숙해졌다.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전시, 민족학 전시, 심지어 ‘인간 동물원’이라고 불리는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괴물 쇼는 이러한 현상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크라오가 끌어들인 관심의 정도는 이례적인 것이었지만, 유사한 공연에 참여했던 다른 ‘털 많은 여성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버마의 털 많은 소녀 마메’와 ‘버마의 털 많은 여성 마푼’은 1886년 크라오가 런던 무대 위에 있었을 당시에 모두 공연하고 있었다. 이 두 여성 모두 ‘버마인’으로 지칭하고 그 연관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동양의 전통의상으로 주장되는 것을 입고 등장시켰다는 사실은 민족적 이국주의(ethnic exoticism)가 그러한 행위의 일부였음을 시사한다.

크라오의 전시를 둘러싼 홍보에서 그녀의 인종적 차이를 부각하는 것은 중요했다. 크라오의 신체적인 외양이 관객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해, 파리니는 공연과 함께 판매한 긴 팜플랫에서 크라우를 잃어버린 고리로 홍보하며 그녀의 전시를 장식했다. 그 팜플랫은 파리니가 크라오를 발견한 것에 대해 말하는 고전적인 제국주의 모험담이었다. 팜플랫에서 동남아시아는 폭압적인 왕들이 통치하는 곳으로 ‘문명화된’ 영국과 대조를 이뤘다. 그곳에서 용감한 백인 남성 탐험가는 정글에 숨어있는 위험과 싸우며 궁극적으로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버바인, 라오스인이나 또는 시암인 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크라오가 어떤 종족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더 복잡하다. 공연과 함께 판매된 팸플릿에는 그녀가 특이하거나 ‘괴물 같은’ 개체가 아닌 털이 나고 나무를 타는 ‘종족’으로 묘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또한 광고의 슬로건인 ‘크라오: 살아있는 잃어버린 고리’이자 털 많은 종족의 딸, 그리고 이제 문명화된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에도 해당한다. 크라우는 ‘털 많은’ 특정 부족에 속하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그녀가 태어난 세계와 ‘문명화된 세계’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그려 그녀의 민족성과 털이 많은 특징 모두 평범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문명화되지 않았음을 강화했다. ‘만약 크라오가 라오스에 있는 자신의 고향집에 남아있었다면 언젠간 인간 원숭이 왕국의 여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광고 팸플릿은 추측했다. 다른 잡지는 ‘그녀는 자연의 규칙적인 질서에서 탄생했다.’고 썼다. ‘그녀는 털이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손이며, 털이 많은 한 종족에 속한다. 그녀의 몸에 난 털은 길이가 약 2인치이며 이마에 난 털은 약간 더 길다. 그녀의 눈은 크고, 검고, 매우 명석하다.’


여성성

성(gender) 문제도 크라오가 제시되는 방식을 형성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이미지상으로 볼 때, 털은 섹슈얼리티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크라오가 자주 제대로 옷을 갖추지 않은 채 등장하거나 그려졌다는 사실은 관객들의 관심을 피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더 여성적인 옷을 입었다. <랜드 앤 워터(Land and Water)>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크라오는 크고 반짝이는 눈, 두 줄의 이빨과 여분의 음식을 담아두기 위해 볼에 잘 발달된 주머니를 가지고 있고, 두 개의 마디로 된 손가락 관절과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털 그리고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드럽고 연약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관능적인 의미가 담긴 ‘반짝이는 눈’과 또한 지나치게 털이 많이 난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 사이의 대조는 일종의 부조화를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네이처(Nature)>지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니 씨의 호의 덕분에 나는 이 흥미롭고 작은 부랑아와 사적인 인터뷰를 가졌다. 머리와 낮은 이마에 난 짙은 검은색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풍성한 눈썹 밑으로까지 내려와 모두 덮었다. 몸 전체에도 약 1인치 반 길이의 부드럽고 검은 털이 빽빽하게 자라 있다. 코는 극도로 편평하며, 지나치게 넓은 콧구멍이 꽉 찬 볼과 합쳐져 있다. 그녀의 여성적 특성은 육체적인 다른 요소들에 의해 다소 손상된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줄리아 파스트라나 광고지


비슷한 사례는 종종 ‘세상에서 가장 추한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공연했던 괴물 쇼의 또 다른 출연자인 줄리아 파스트라나( Julia Pastrana)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크라오처럼 파스트라나도 많은 체모를 가졌고, 또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코, 이마, 얼굴, 어깨, 팔 등은 두껍고 검은 털로 덮여 있다. 코에는 연골이 없으며, 위턱과 아래턱에는 이중 잇몸이 있고, 아래턱 앞니 한 줄만 크게 뻗어 나있고, 얼굴 각도는 매우 특이하다.’ 크라오의 자기 결정권의 정도가 어떻든 간에 줄리아 파스트라나는 훨씬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 그녀의 명시적인 바람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계속해서 대중적인 오락을 목적으로 전시되었다.


이른 죽음

크라오는 런던에서의 전시 후, 마지막으로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날 때까지 유럽 대륙과 미국에서 공연을 이어갔다. 그녀는 1926년에 사망했는데 아마도 40세 즈음이었을 것이다. ‘이국적’’이며 ‘괴물스러운’ 것으로 상징되었던 크라오의 삶은 착취의 일환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빅토리아 시대 여흥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괴물 쇼’는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 아이디어가 대중들에게 이해된 곳이자, 인종, 성별 및 장애에 대한 태도가 진지하게 공식화된 장소였다. (번역 김명호)


* 저자 에스메 크레얼(Esme Cleall)은 셰필드 대학에서 영국 제국의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 원문 출처

https://www.historytoday.com/archive/feature/missing-links-victorian-freak-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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