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요아킴 그람: 그람 염색의 창시자


그람 염색법을 개척한 한스 크리스티안 요아킴 그램(Hans Christian Jaochim Gram)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1853년 9월 13일에 태어났다. 초창기 그의 관심분야는 식물, 약학 및 현미경이었다.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코펜하겐의 시립 병원에서 최종적으로 수련의가 되었다. 그람의 초기 연구는 사람의 적혈구에 관한 것이었다. 그람은 약학과 세균학을 공부하며 유럽 곳곳으로 여행하였고 미생물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칼 프리드랜더의 베를린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였다. 그람은 이곳에서 박테리아를 염색하고 식별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완성하였다. 그의 경력을 보면 학생의 임상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람은 1923년에 의학계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살았다. 그는 1938년 85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초창기

한스 크리스티안 요아킴 그람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1853년 9월 13일에 태어났다. 그는 법학 교수인 Frederik Terkel Julius Gram과 Louise Christiane Roulund의 아들이었다. 약리학자와 병리학자로서 기량이 뛰어났던 그는 초기에 자연과학을 연구하였고, 1871년 코펜하겐 메트로폴리탄 대학에서 학위를 땄다. 그의 초창기 관심에는 식물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1873년부터 1874년까지 동물학자 스텐스트러프(Japetus Steenstrup)의 식물학 조수로 일했다. 이 직책을 통해 약리학의 토대와 현미경의 사용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그람은 곧 의학에 흥미를 느끼고 1878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향후 몇 년 동안, 그는 코펜하겐의 시립 병원에서 인턴으로 재직하였다. 

그람의 초창기 연구는 인간 적혈구 연구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대적혈구(macrocytes)는 악성 빈혈 환자에게서 독특하게 나타나며, 황달을 지닌 환자는 종종 적혈구 세포 수가 증가하는 것이 관찰된다는 것을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윌리엄 헨리 하웰(William Henry Howell)과 함께, 그람은 혈액의 응고 시간을 알아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 방법을 통해 하웰과 그람은 혈우병 hemophilia 환자에게서 자주 장시간의 출혈이 있음을 관찰하였다. 

1882년 그는 위황병(chlorosis, 철분 결핍에 의한 빈혈증: 역자 주)에서 인간 적혈구의 수와 크기를 설명하는 논문을 통해 대학에서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이것은 소적혈구성 빈혈증으로 만성적인 혈색소 감소의 한 유형으로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용어다. 그는 이 질병 과정이 적혈구 세포의 감소에 비례해  헤모글로빈의 엄청나게 큰 감소를 특징으로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 해에 인간 적혈구 크기에 관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옹호하였다. 

주요 경력

1883년부터 1885년까지 그람은 스트라스부르, 마르부르크, 베를린에서 약리학과 세균학을 공부하며 유럽 도처를 여행하였다. 개인 연락처를 통해 그람은 존경받는 미생물학자 칼 프리드랜더(Carl Friedländer, 1847~1887)의 베를린 연구실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그람은 1883년 10월 22일 베를린에 도착한 후, 세균학의 역사에서 자신의 영원한 지위를 세우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불과 2주 만에 그는 자신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만들 작업, 즉 1884년 공식적인 문서에서 설명된 그의 박테리아 염색법을 달성하였다. 

폐렴으로 사망한 환자의 폐에서 구균(cocci)을 분리하는 동안, 그람은 특정 염색이 박테리아 세포에 의해 우선적으로 유지, 지속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람이 절편(sections) 위로 메틸 바이올렛으로 염색되는 일부 루골 요오드 용액(Lugol’s iodine solution, 그람염색의 매염제로 사용되는 시약의 일종: 역자 주)을 우연히 쏟는 바람에 나중에 알코올로 그것을 씻어내려다가 그람 염색법을 발견한 거라고 추측한다.  

그의 선구적인 방법은 버너 위에 유리 슬라이드를 놓고 액체 도말표본(현미경 표본 제작법의 일종: 역자 주)을 건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도말 표본은 그다음 젠티나(크리스탈) 바이올렛 액으로 염색한다. 물로 세척 후, 그는 정착액인 루골 용액(칼륨3중 요오드 용액)을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염료를 씻어 슬라이드에 에탄올을 부었다. 특정 박테리아(예로 폐렴구균pneumococci)는 염료의 색을 유지하는 반면(그람 양성), 다른 종은 표백되었다(그람 음성). 

그람의 방법은 1884년 저널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랜더는 그람이 보고서를 출판하기 몇 달 전 1883년 논문에서 간단히 그람 염색을 언급하였다. 이 초기 출판물은 그람 염색의 임상적 유용성을 설명한 최초의 설명 중 하나였다. 1882년 프리드랜더는 폐렴으로 죽은 환자의 폐로부터 유기체를 배양하였다. 오늘날 폐렴 간균Klebsiella pneumoniae으로 알려져 있는 이 캡슐화된 박테리아(encapsulated bacterium)는 Friedländer pneumobacillus라고 불렸다. 같은 시기에 알버트 프랜켈(Albert Fraenkel)은 폐렴구균을 발견하였다. 프랜켈과 프리드랜더는 이 유기체가 대엽성 폐렴(lobar pneumonia, 1개 이상의 폐엽이 침범된 염증성 폐렴: 역자 주)의 원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새롭게 도입된 그람 염색은 폐렴 간균이 그람 음성이고 폐렴 구균은 그람 양성으로서 논쟁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폐렴 간균은 이후 폐렴의 경우에서 부수적인 침입자(secondary invader)로서 인식되었다. 

그람은 1884년 프리드랜더의 실험실을 떠난 후 박테리아 염색의 추가 연구에 결코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미래의 임상의에 의해 수정될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의 첫 책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비록 나는 그것이 매우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연구에서는 유용할 것으로 판명되기를 기대하며 따라서 그 방법을 출판하였다.”  

실제로 방법론의 변경은 프랑크푸르트의 셍켄베르크 재단의 이사인 독일의 병리학자 칼 바이게르트(Carl Weigert)에 의해 몇 년 후에 일어났다. 그는 샤프라닌(safranine)염색을 마지막 단계에 추가했다. 이 단계는 그람 음성 미생물에 대해 대비 염색제(counterstain)로서 기능하였다. 그람 자신은 결코 대비 염색제를 사용하지 않았다. 

훗날 그람 염색의 기본 방법은 모든 박테리아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마이코박테리아(Mycobacterium, 염기성 아날린 염색으로 염색 가능함. 대표적은 종으로는 결핵균이 있음: 역자 주) 종은 염색의 침투를 방지하는 밀랍 같은 외피 때문에 염색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박테리아는 “항산성 세균(抗酸性, acid-fast)”으로 알려져 있다.  

그람과 다른 과학자들은 당시 이 발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19 세기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람 염색의 유무가 유기물을 설명하는 중요한 통례로 자리잡았다. 이 방법은 곧 세균성 질병의 치료를 결정하고 박테리아를 두 그룹으로 나누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교과서는 이미 1886년 그람염색 방법을 서술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람염색의 발견은 박테리아의 화학적 조성에 관한 깊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람 염색에 따른 분별화를 통해서 세균의 구조, 복제 방법 및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다른 미생물학자들에 의해 더 진전된 연구가 시도되었다. 후기 메커니즘은 M.J.R. Salton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그람 염색의 차이가 높은 농도의 에틸 알코올에서 처리된 후 그람 양성 박테리아의 투과성 장애(permeability barrier) 생성에 의존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1963년 논문이 나오기까지 이 메커니즘은 완전히 설명되지 못했다. 그람 양성 박테리아에서 두꺼운 펩티도글리칸 층(peptidoglycan layer)의 알코올 탈수는 크리스탈 바이올렛-요오드 복합체를 잡아두는 작은 구멍을 생성한다. 반면 알코올 처리는 외막 지질의 추출에 의해 그람 음성 박테리아에서 더 큰 투과율을 야기한다. 박테리아의 구조와 복제의 발견은 또한 박테리아의 고유한 구조적 잇점을 활용하여 항생제의 개발 및 사용을 위한 길을 닦았다. 

그람이 베를린을 떠나고 나서, 그의 연구 촛점은 다시 바뀌었다. 그는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코펜하겐 대학에서 약리학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람은 1889년에 Louise I.C. Lohse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1년 후에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약리학 강사가 되었고 그 해 말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동안 그는 덴마크에서 임상 강의에 관한 표준 교과서라 할 4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임상 의학에 집중하기 위해 약리학에서 은퇴하는 1900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추가로 그는 대학 밖에서, 내과에서 많은 개인적인 연습을 하였다. 1892년부터 그는 Kongelige Frederiks 병원과 Rig shospitalet에서 내과의 최고 책임자 및 과장이 되었다. 그의 철저함은 학생과 조수에게서 매우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우수한 임상의로 여겨졌다. 그는 학생의 임상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그는 임상 실습에서 합리적 약물 치료법에 관한 그의 관심을 서술한 4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1901년 부터 1921년까지 약전 위원회(Pharmacopoeia Commission)의 의장으로서 그는 더이상 쓸모가 없는 치료법들을 의학계서 퇴출시켰다. 그람은 1893년에 국립 보건 위원회(Royal Health Commission)의 회원이었으며, 많은 저명한 의학 사회에서 명예 회원으로 선택되었다. 1912년, 현재 오슬로 대학교의 전신인 Kristiania University에서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고, 덴마크 국왕은 1912년에 Dannebrog Commander’s Cross를, 1924년에 Golden Medal of Merit를 수여하였다. 


후기

1923년 그람은 내과 과장 자리에서 은퇴하고 예전의 흥미로 되돌아가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이후 1938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마지막 출판물 중 하나는 “갱년기 후의 세가지 증상(A symptom-triad of the post-climacteric period)”였다. 이것은 오늘날 폐경 후 세 가지 특징 (동통성 지방증(adiposis dolorosa), 무릎 관절의 변형 관절염(arthritis deformans), 동맥성 고혈압(arterial hypertension)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그는 가장 유망한 비교 치료 시험 중 하나를 발표했다. 그는 신우신염  (pyelonephritis, 신우 및 신실질의 염증이고 주로 대장균 등의 그람음성 간균에 의해서 생긴다: 역자 주)의 치료제로 살롤(salol), 헥사민(hexamine)과 칼륨 만달라이트(calcium mandelate)를 비교하였다. 각 그룹에는 27명의 환자가 있었다. 그는 칼륨 만델라이트로 14일간 치료한 23명의 환자에게서 살균된 소변을 관찰하였지만, 헥사민은 단지 8명만 그러하였다. 

그람 박사는 의학과 과학의 연구와 진보에 전념한 삶을 살았다. 그는 동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고 많은 연구를 출판하였다. 그는 인생 말미에 31세에 고안한 염색 기술로 세계에 알려진 것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끝>


* Madani, Kaivon. "Dr. Hans Christian Jaochim Gram: inventor of the Gram stain." Primary Care Update for OB/GYNS 10.5 (2003): 235-237.를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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