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덴부르크의 혁신



과학적 발견은 4세기 동안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지식을 순환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따라서 초기 과학의 가장 중요한 혁신 중의 하나는 과학 저널이었다.

그 탄생에는 근면한 독일인 하인리히 올덴부르크(Heinrich(Henry) Oldenburg)에게 빚지고 있다. 그의 고향인 브레멘과 위트레흐트에서 교육받은 그는 교회나 대학에서 경력을 쌓으려 했다. 그러나 1640년대 초에 직접 유럽의 지적, 정치적, 종교적 삶을 경험하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일부 정직한 상인’이나 귀족의 아들과 동반 여행을 하는 교사 자리를 구했다.

올덴부르크는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어를 숙달하고 유럽의 주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서 폭넓은 친분을 쌓았다. 그의 영어 실력은 새로운 실험과학을 열렬히 추종하는, 같은 생각으로 맺어진 훗날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될 많은 이들과 접촉할 수 있게 했고, 1660년 런던에서 공식적으로 미팅을 시작했다.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은 그보다 영어를 더 잘 구사하는 외국인은 결코 들어본 적 없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섬뜩한 정도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이 잘난 여행가이자 마당발(networker)은  영국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유럽의 지식을 고심하는데 이상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따라서 자연스레 왕립학회 최초의 간사(secretary) 자리를 선택했다.

올덴부르크는 영국에 유럽 과학의 진보에 관한 소식을 알리고, 그리고 반대로 영국 내 연구 소식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연락처로 정기적으로 글을 써서 보내며 특별한 헌신과 에너지로 역할을 채웠다. 그러나 왕립학회는 약속한 월급을 지급하는데 실패했고, 올덴부르크는 화학의 선구자 로버트 보일에 대한 번역과 출판 대리인으로서 근근이 먹고 살면서 돈도 받지 못한 채 일에 치여 사는 자신을 발견했다. 1665년에 그는 왕립학회에 새로운 사업을 제안했다. 왕립학회의 활동을 고취하고, 과학적 커뮤니케이션을 발전시키며, 여섯 개의 언어로 수십 개의 편지에 같은 소식을 반복적으로 써야 하는 노동에서 자신을 구해내고, 적절한 생계를 벌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매달 정기적으로 자연 철학을 다룰 것이며, 왕립학회의 권위와 함께 인쇄되고 올덴부르크에 의해 출판되었다.

첫 발행은 1665년 3월 6일이었으며 현재까지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는 계속해서 출판되고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 저널이며 영국에서 발행하는 어떤 정기 간행물보다도 오래되었다. 올덴부르크의 혁신은 많은 부분에서 모방되었다. 오늘날 출판되고 있는 과학저널의 수는 30,000개 이상인 것으로 추정한다.

과학 저널의 성공은 그 당시 상당히 확신에 찬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철학 회보]를 발행한 첫해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모든 혼란-전염병, 화재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먼저 전염병이 1665년 여름 영국을 강타했다. 협회의 고위 회원들 대다수는 질병을 피해 옥스퍼드나 시골로 도망갔지만, 올덴부르크는 남아서 전염병에 맞섰다. 그는 계속해서 대륙으로부터 과학 소식을 받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철학회보]가 옥스퍼드에서 인쇄할 수 있도록 서신을 통해 자료를 정리하고 계속해서 왕립학회를 유지하며 저널 출판을 유지해나갔다.

화재가 뒤를 이었다. 1666년 9월의 대화재로 인한 출판 사업의 중단은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많은 출판업자가 그들의 물품과 작업장을 잃었고, 올덴부르크는 그 여파에서 저널 출판에 착수할 수 있는 이를 계속해서 갈망했다. 그가 보일에게 쓴 걱정스러운 편지에서 보듯, 저널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여러 달 동안의 저널 수익에서 자신의 지분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실제로 유럽 대륙에 “어느 정도 시장성 있는 책”으로 포장하여 서적상과 더 나은 거래를 틀 수 있는 재무 상태가 아니었다.

마지막은 전쟁이었다. 이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첫 번째 [철학회보]가 출판된 며칠 이내에 발발했지만, 1667년 여름까지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유럽 북해 연안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 구성된 지역)와 올덴부르크 사이의 교류를 약간 방해했을 뿐이었다. 6월에 메드웨이 강에서 일어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으로 영국 사회 모든 계층은 공황과 분노를 일으켰다. 희생양을 찾기 위해 정부 당국은 누가 봐도 외부인이었던 올덴부르크가 해외로 보낸 편지에서 일부 부주의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해 런던탑에 투옥할 것을 주문했다.

올덴부르크는 처음엔 필기구를 거부하고 단지 소수의 방문자만을 허락하며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왕립학회의 회원인 사무엘 페피스(Samuel Pepys)는 끊임없이 철학적(과학적) 문제를 주고받던 프랑스의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한 것과 관련한 올덴부르크의 투옥이 시대의 위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올덴부르크의 진정한 친구이자 그를 가르쳤던 보일에게서 그는 비참함을 목격했다. 몇몇은 그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대다수는 그가 투옥된 것에서 교훈을 얻어 그를 찾지 않고 떠났다. 그는 어떻게 해야 석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일부 높은 위치에 있는 친구들, 그중에서도 아마 보일이 사실상 그를 위해 탄원했던 것 같다.

8월 말에 석방된 올덴부르크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 아마도 무원칙한 발행은 친구의 선의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프랑스에서 실행된 수혈실험을 [철학 회보]에 실어 임시방편으로 발행했다. 올덴부르크는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저널에서 그 호를 빼버렸다. 그 이유는 자신의 관리하에 게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가 영국보다 수혈에 관한 우선순위가 높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철학회보]는 이러한 고난과 1677년 9월 올덴부르크의 갑작스러운 사망에도 살아남았다. 저널 업무는 결코 그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1668년 피카델리에 있는 자신의 집 임대료를 간신히 낼 정도의 임금을 받았고, 그는 자신의 노력을 인식시키려 왕립학회에 자신의 급여를 투표에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풍경의 일부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왕립학회는 저널을 없애기를 거부하고, 계속 발행될 수 있도록 올덴부르크의 후임자를 괴롭혔다.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다른 저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왕립학회는 [철학 회보]의 발행을 시작한 이래로 1753년에 150여 개의 회지를 발행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잘 진행되어 갔다. (번역 김명호)


번역 출처: http://www.historytoday.com/noah-moxham/innovative-olden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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