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사회적 저항은 함께 한다

근세 영국의 학자들은 전염병과 사회적 저항이 종종 어떻게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1348년의 흑사병은 1381년의 농민 반란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전염병이 휩쓴 런던 거리. 위키미디어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전국을 휩쓸고, 엄격한 방역조치가 신속하게 시행된다. 사망자 수는 증가하지만 정부 보고는 믿을 수 없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며 사회적 고립은 타격을 받는다. 시민들은 노동권을 주장하며 정부의 명령을 어긴다. 이웃끼리 서로 등을 돌린다. 오랜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해 폭동이 일어나고, 시위자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한다. 익숙하지 않은가?


매우 유사하긴 하지만, 이건 2020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근세 영국에 대한 묘사다. 1348년에 시작된 흑사병은 300년 이상 지속되며 유럽은 끊임없는 전염병의 파도에 휩쓸렸다. 영국에서는 1563년부터 1666년 사이에 여러 차례 전염병이 런던을 강타했을 때 특히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전염병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적 반응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전염병과 사회적 저항은 한마디로 상관관계에 있다.


필립 지글러와 마크 센과 같은 학자들은 1348년의 흑사병이 영국 최초의 대규모 민중반란인 1381년 농민봉기(Peasants’ Revolt)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이 그 연관성에서 설명하듯이, 흑사병은 영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죽였다. 극심한 노동력 부족으로 농민들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고, 농노 제도의 종식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농민 봉기 동안 농민들은 왕실 정부의 구성원들을 처형하고, 감옥을 부수고, 공공건물을 불태웠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후 30년 뒤에 일어났기 때문에 전염병과 봉기가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마크 센은 흑사병이 이미 런던에 존재했던 억압적인 사회 상황을 악화시켜 반란을 초래했다고 제안한다. 본질적으로 벌금과 세금 증가, 높은 임대료, 고정된 수입 등 경제적 불평이 반란의 근간이었다.

1460~1480 사이에 출판된 책에 실려있는 농민 반란을 묘사한 삽화. 위키 미디아.


16세기로 빨리 감아보자. 흑사병의 악몽에 시달렸던 영국 정부는 다시 전염병이 발발하자 재빨리 진압에 나섰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1578년 어느 날엔가 감염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가구는 6주 또는 40일 동안 모두 격리하도록 하는 공식적인 전염병 지침을 내렸다. (방역(quarantine)이란 용어는 베네치아 검역소에서 나온 말로, 40일을 뜻한다.) 그러나 미시간 주의회 의사당을 습격한 무장 시위대에서 보듯 “집에 머물러라(Stay at Home)”는 정부 명령에 반대한 2020년 시위처럼 엘리자베스 시대의 많은 이들도 정부 명령을 따르길 거부했다. 내과의 파라셀수스는 자신의 1596년 의학 교본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이 얼마나 미친 짓이고 잔혹한 어리석음인가. 어떤 커다란 역병이 유행할 때, 예를 들어 당신이 감염되면, 당신은 집안에 틀어박혀 그것들에 표식을 씌울 것이며, 감옥에 가두어 근심과 고독으로 그것들의 목을 조르고, 굶주림으로 그것들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역병이 치료될 수 있을까?


시인 조지 위더도 1625년 발발 당시 이와 유사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서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가난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엄명은 우리의 슬픔을 더욱 격분시켰고,

안정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


이러한 “엄명”은 부담으로 여겨졌고, 많은 이들이 치료를 병보다 더 나쁘다고 여겼다.


전염병 지침을 무시했던 런던 시민들은 공중 보건의 근거를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키라 뉴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질병 예방에 대한 정부의 이야기와는 달리 대중들은 신중한 정책보다는 개인적인 처벌로서 격리와 방역을 이야기했다.


극작가 토마스 데커는 근세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거부감을 조롱으로 묘사했다.


만약 당신이 들판을 살펴본다면, 거리를 살펴본다면, 여관을 들여다본다면, 선술집을 들여다본다면, 그들은 모두 유쾌하고 명랑하다. 어떤 역병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며, 어떤 기도도 그들을 각성시키지 않으며, 어떤 단식도 그들을 순종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들판에서 그들은 함께 걷고, 말하고, 웃고, 놀고, 운동을 한다. 거리에선 신성 모독을 하고, 사고팔며, 욕설을 한다. 여관 그리고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고함을 치고, 과식을 한다.


미국 언론들이 2020년 3월 코비드 19에도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에 놀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데커는 예방책의 부족에 혀를 내둘렀다.


런던 시민들은 단순히 전염병 지침을 따르는 것에 싫증이 났다. 1665년 한 통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죽음은 이제 너무나 친숙해졌고 사람들은 위험에 대해 무감각해져서 마치 폭군과 압제자가 공공의 안전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긴다.


뉴먼이 지적했듯이 시민들은 공중 보건 정책을 폭압적이라고 여겼고, 공공연히 그리고 비밀리에 전염병 지침을 거부했다. 예를 들어 생선 장수 스티븐 스미스는 격리기간 중에 생선을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신사인 제레미 라이트는 경찰과 그의 조수가 자신의 집을 폐쇄하려고 하자 물리력을 행사했다. 그런 절망적인 시기는 많은 이들을 비밀과 범죄, 폭력으로 이끌었다.

1625년 토마스 데커의 전염병 팜플렛에 사용된 채색된 목판화. 위키미디아


근세 영국의 학자들은 전염병과 사회적 저항이 종종 어떻게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1348년의 흑사병은 1381년의 농민 반란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근세 영국의 학자들은 전염병과 사회적 저항이 종종 어떻게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1348년의 흑사병은 1381년의 농민 반란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지침을 준수하는 것에 대한 인식 부족은 지속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추밀원 의회는 공중 보건 규칙을 따르지 않은 "시민들의 지독한 부주의함과 느슨한 태만함"을 비난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고문인 로버트 세실은 “제멋대로 구는 감염자"에 대해 불평했다. 이후 전염병 지침을 지키도록 강제하기 위해 체벌을 가했다. 1604년부터 감염된 이가 공공장소에서 발견되면 누든지 간에 교수형에 처할 수 있었고, 가정 격리에서 몰래 탈출한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채찍질을 당할 수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가혹한 조치들이 지역 사회의 또 다른 흑사병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뉴먼이 보여주듯 이 같은 가혹한 조치는 중산층 사이에서 “불평등과 처벌당하는 느낌”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주로 마차 제조공, 잡화상, 생선장수, 재단사, 여관 주인과 같은 영세 자영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수입 없이 장기간의 지출을 견디기에는 자산이 부족했다. 중산층은 그들의 지위와 생계에 있어 흔치 않은 위협에 직면했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많이 받을 만큼 가난하지 않았지만, 또한 도시를 탈출할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다. 이는 더 부유한 런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부담이었다. 도시에 남기로 선택한 부유한 개인들은 더 적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40일 동안 일하지 않고도 격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반면, 넓은 집은 질병의 흔적을 숨길 수 있어서 사실상 전면적인 격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일부는 생계를 위해, 혹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방역 규정에 저항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라고 주장하며 항의했다. 비록 더 큰 선을 위해 검역법이 제정되었지만, 그 법은 교회가 제시하는 도덕 기준과는 모순된다. 그레이엄 햄밀에 따르면, 그러한 법률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의 불일치는 “국가가 주민의 존재를 보존하고 보호해야 하는 수단에 대한 논쟁을 야기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전염병 지침이 자선 행위로 선포되는 동안, 정부는 “자선은 더 이상 단순히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선은 또한 병자를 보호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검역법은 병든 이웃의 방치를 요구했다. 이것은 때때로 종교적 징벌과 도덕적 부패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전염병 지침에 저항하는 이들은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이 본질적으로 “감염의 위험”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함에 따라 그러한 두려움은 결국 방역에 대한 대중의 반대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이웃 돌봄”에 관한 윤리는 조지 플로이드가 미니애폴리스에서 살해된 2020년 5월 25일에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시위대는 2000여 개 도시와 50여 개 주, 60여 개의 나라에서 일제히 모였다. 코비드 19의 범유행으로 인해 유발된 사회적 고립, 무력감, 좌절과 같은 긴장된 상황은 2013년에 창설된 블랙 라이브즈 매터(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다시 세계 무대로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바이러스는 불쏘시개였고, 경찰의 잔혹성은 거기에 불을 붙였다." 많은 시위가 평등을 요구하는 반면, 모든 시위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인종적 정의와 경찰의 잔혹성 종식을 요구하는 흑인들 시위의 중대성은 확실히 “집에 머물라”에 반대하는 시위의 요구를 퇴색시킨다. 간단히 말해서 코비드 19의 확산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블랙 라이브즈 매터 시위자들은 이웃 간의 보살핌이 잠재적인 건강 문제보다 더 낫다고 결정했다.


항의를 위해 검역을 위반하는 위험을 가늠하는 것은 공중 보건 정보를 신뢰할 수 없을 때 특히 어려울 수 있다. 근세 런던 사람들은 엄격한 전염병 정책에 항의하기 쉬웠다. 그리고 엄격한 전염병 정책이 더 높은 사망률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방 정부는 의도적으로 전염병을 과소 보고할 것이다. 영국의 해군 장관이자 국회의원인 새무얼 피프스는 1665년 8월 31일 자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도시에서 이번 주에 7,496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6,102명이 전염병에 걸렸다. 그러나 이번 주 사망자의 정확한 수치는 거의 1만 명에 육박한다는 우려가 있었다.”


공공 보건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반면, 이 전략은 시민 불안을 최소한으로 유지시켰다. 영국 정부는 고의적으로 전염병을 잘못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한 사회적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했다. 런던에 있는 극장이 전염병 때문에 주기적으로 문을 닫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스즈키 미호코가 <비평>지에 쓴 것처럼 이것은 또한 “사회적 무질서와 저항”의 시대였다.


바바라 프리드먼이 영국 문학의 르네상스에서 지적했듯이, 극장 폐쇄는 전염병보다는 대중 폭동과 더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굶주린 노동자들이 주도한 식량 폭동부터 학대받는 도제들이 주도한 노동자의 권리 폭동까지, 관계자들은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대규모 집회를 줄이려 “전염병" 핑계를 댔다. 예를 들어, 1580년에 시장이 추밀원에 보낸 서한에는 극장 폐쇄를 요청한 이유로 “큰 혼란"을 들었다. 추밀원은 동의하면서도 대신 감염 위험을 이유로 들었다. 프리드먼이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전염병 통제는 사회적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4세기 농민 반란의 발판을 마련한 흑사병이나 1590년대 도제들의 폭동에 발판을 마련한 전염병 발발과 마찬가지로 코비드 19의 대유행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압력솥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과 정의 시스템의 인종적 불균형을 조명하고, 자본주의 신화의 오랜 결함을 폭로했으며,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향한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근세에 방역 조치에 저항한 이들은 “아픈 이를 돌보는 것 이상의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고, 이런 이웃에 대한 책임감은 이안 문로가 “런던의 상징적 의미”라고 부르는 것을 불러일으켰다. 현재의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에 대한 폭발적인 지지는 이웃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흑인과 황인 이웃의 삶을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미국의 상징적 의미는 "모든 이들을 위한 자유와 정의"일 수 있지만, 이것은 항상 제도적인 인종차별에 의해 불균형적인 영향을 받는 집단에겐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레이엄 해밀은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정치 공동체의 새로운 비전을 이끈다”라고 주장한다. 근세 초기 영국에서는 전염병의 시기에 고통스러운 사회적 긴장감이 만연했고, 이에 따라 제도적인 변화와 폭력적인 시위를 초래했다. 2020년은 달라야 한다고 기대할 이유는 없다. (번역 김명호)


* 번역 원문: https://daily.jstor.org/plague-and-protest-go-hand-in-hand/?utm_term=Read%20More&utm_campaign=jstordaily_08202020&utm_content=email&utm_source=Act-On+Software&utm_medium=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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